일명 화평법, 화학물질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은 구미의 불산 유출사고 등 화학물질 유출사고, 화학공장 폭발사고, 가습기 살균제 등 생활화학물질 사고가 잇따르면서 화학물질의 안전관리를 취지로 제정됐으며 관련기업이 신제품 개발 및 연구, 생산 등에 사용하는 모든 신규 화학물질을 평가·분석해 정부기관에 등록하도록 하는 제도이다.
최근 화학공장 폭발사고 및 화학물질 유출사고가 잦아들고 있지만 화평법이나 화관법(화학물질관리법)이 제정되지 않았어도 그러할지 의문이 든다. 우리나라는 1960년대 중반부터 대형 화학공장을 건설하기 시작했고 1970-1980년대에 가장 많이 건설했다는 점에서 사고가 다발적으로 일어날 개연성이 크다는 것은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특히, 화평법이 원안대로 시행됐더라면 오늘날 옥시 사태와 같은 독성 화학물질 논란이 계속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부가 화평법 적용범위 및 대상을 크게 축소했을 뿐만 아니라 관련기업의 부담을 덜어둔다는 미명 아래 시행령 및 시행규칙을 제정하면서 규제를 크게 완화한 것이 문제를 불러온 것은 분명하다.
화평법은 관련기업이 취급하는 신규 화학물질과 연간 1톤 이상 제조·수입·판매되는 기존 화학물질에 대해 정부에 등록토록 했으나 법률 제정과정에서 산업계의 불만이 크다는 것을 이유로 명분도 없이 규제를 무력화시키는 조치를 서슴없이 취했다.
산업계가 등록비용이 지나치게 많이 들고 영업비밀을 공개해야 한다는 등 크게 반발했기 때문으로, 심지어는 연구개발(R&D)용 화학물질은 등록 면제대상으로 지정한 것도 모자라 면제받기 위해 제출해야 하는 각종 서류까지 면제해주는 이중특혜를 베풀었다. 일부에서는 미국 무역대표부(USTR)가 민감한 기밀정보를 유출할 수 있다고 지적한 것을 계기로 통상마찰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하면서 압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규제를 완화한 결과 옥시를 비롯해 애경, SK케미칼, 대형 마트 등이 연루된 가습기 살균제 사태가 벌어졌어도 아무런 대책도 세울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고, 담당 공무원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거나 손을 놓고 있어도 무엇 하나 진척시킬 수 없는 기형적 행정공백 사태를 불러오고 있다.
만약, 대형 화학공장이 폭발해 독성 화학물질이 대량 유출되는 등 안전사고가 다발적으로 발생하거나 독성 화학물질을 실은 대형 탱크로리가 무질서한 운행 끝에 전복되는 등 사고가 발생하면 어찌할 것인가?
더군다나 가습기 살균제처럼 연간 사용량이 1000kg에 미치지 못해도 수백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사고가 발생할 수 있는 판에 마음만 먹으면 연구개발 명목 아래 독성 화학물질을 대량 유통시킬 수 있고, 우리 주변에는 독성이 어느 정도인지 구분이 애매모호한 생활화학물질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가습기 살균제와 같은 사태가 재발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정부가 지나치게 안이하게 대응하면서 변호사, 교수 1000명이 징벌적 손해배상을 지지하는 변호사·교수 모임을 발족하고 불법행위를 저지른 해당기업에 대한 책임 추궁과 피해자에 대한 충분한 배상을 법제화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옥시 사태가 재발하지 않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취지로, 식품 및 약품, 세제 등 생활화학제품을 대상으로 한 악의적이고 반사회적인 행위에 대해서는 실제 손해보다 수배의 배상액을 요구할 태세이다.
정부는 화평법 및 화관법을 빨리 보완해 가습기 살균제와 같은 불행한 사태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사전예방적 조치를 강구함은 물론 악의적인 행위에 대해서는 징법적 손해배상제와 같은 엄한 처벌을 통해 독성 화학물질의 불법 유통을 근절시킬 것을 촉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