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화학은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고통이 온 뇌리를 마비시키고 정신을 혼미하게 하고 있다.
1997년 IMF 경제위기 때도,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느껴보지 못했던 어두움이다. IMF 경제위기나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에는 나름대로 아픔이 있었지만 중국이 고도성장을 계속한 까닭에 큰 어려움을 겪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다.
현대석유화학과 삼성종합화학이 문을 닫았지만 무리한 신규 참여와 사업 확장의 결과일 뿐 석유화학 전체의 고통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1994년 3월 석유화학기업들이 상공부와 공정거래위원회의 묵인 아래 합성수지 수급 및 가격 담합에 나서 전세를 역전시킨 것까지는 좋았으나 카르텔을 장기화하면서 부실이 감추어지고 판단을 흐리게 한 결과로 이어졌을 뿐이다.
하지만, 2018년 10월 이후 본격화된 석유화학 불황은 근본이 다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국내 석유화학기업들은 구조조정을 일정부분 마무리하고 밝은 미래를 향해 노를 젓고 있으나 사실은 잘못된 구조조정이 화근으로 다가오고 있고 당장 양호한 수익을 내고 있다며 백내장을 수술하지 않고 넘어간 결과 앞이 보이지 않고 앞날이 컴컴한 미래를 맞이하고 있다.
중국도 장기간의 고도성장 체제를 마무리하고 성장률 6%가 무너지면서 블랙홀의 역할을 끝내고 있으며 미국과의 무역마찰이 장기화하면서 앞날을 장담할 수 없는 처지로 전락하고 있다. 아마도 장기 고도성장의 후유증이 표면화되고 저가 공세가 막힘은 물론 미국과의 무역마찰이 장기화할 것이 확실하다는 측면에서 더 이상 블랙홀 역할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석유화학은 석탄화학을 중심으로 자급률을 급격히 끌어올리고 있다.
미국도 우호적이지 않다. 정치적으로 상당한 간극이 벌어져 있고 북한과의 3자 줄다리기가 종말을 향해 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더군다나 셰일가스 베이스 공세를 적극화함으로써 아시아 석유화학 시장을 낭떠러지로 몰아가고 있다. 2019년에는 코스트가 크게 낮은 PE 수출에 그쳤지만 2020년에는 에틸렌까지 밀어내기 공세에 나설 것이라고 하니 할 말이 없다.
그렇다고 동남아시아와 중동은 우호적이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중동은 사우디, UAE를 중심으로 협력관계를 강화하고 있지만 정치적 불안정성이 심하고 국제정세 측면에서도 한반도를 뛰어넘고 있다. 동남아 역시 한국과의 협력을 강화하고 있지만 석유화학은 적극적인 투자에 나섬으로써 한국을 위협할 날이 멀지 않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국내 석유화학기업들이 동남아에 진출해 역할 분담에 나서면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으나 롯데를 제외하고는 전혀 아니다.
일본과는 어떠한가? 화학산업 부문에서는 협력관계가 잘 유지되고 있으나 일본 정부의 수출규제에서 비롯된 트러블은 쉽게 해소하기 어렵고 고부가가치 화학소재 국산화 과정에서 협력이 아닌 경쟁관계로 전환될 가능성까지 엿보이고 있다. 발전과정의 진통으로 볼 수도 있으나 딱히 그렇지는 않은 것이 문제일 것이다.
국내 석유화학산업이 사면초가의 신세로 전락했음은 분명하다. 범용을 중심으로 규모화를 추진한 것이 화근으로, 고부가 차별화 전략을 등한시한 결과이나 누구 하나도 미래전략을 전환하겠다고 나서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는 고사성어를 잊지 않았기를 고대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