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TC, SK에게 조기패소 판결 … 2011-2014년 분리막은 SK 승소
LG화학이 SK이노베이션과의 전기자동차(EV) 배터리 소송에서 승기를 잡았다.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가 2차전지 영업비밀 침해 소송과 관련해 SK이노베이션에게 조기패소 판결(Default Judgement)을 내렸기 때문이다. ITC의 최종결정이 남아 있지만 LG화학의 승소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ITC는 2020년 2월14일(현지시각)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의 2차전지 영업비밀 침해 소송과 관련해 SK이노베이션에 조기패소 판결을 내렸다고 발표했다.
영업비밀 침해 소송 전후 과정에서 SK이노베이션에 따른 악의적이고 광범위한 증거 훼손과 포렌식 명령 위반을 포함한 법정모독 행위 등에 대해 법적제재를 내린 것으로, 더 이상의 추가적인 사실심리나 증거조사를 하지 않고 LG화학의 주장을 인정해 예비결정을 내린 것으로 파악된다.
이에 따라 SK이노베이션은 3월 초로 예정됐던 변론 절차를 거치지 못하고 10월5일 ITC위원회의 최종결정을 기다리게 됐다.
SK이노베이션은 2019년 4월29일 LG화학이 영업비밀 침해 소송을 제기하자 4월30일 직원들에게 이메일을 통해 소송의 증거가 될만한 관련 자료 삭제를 지시했고, 4월8일에는 LG화학이 내용증명 경고공문을 보낸 직후 3만4000여개 파일 및 메일에 대한 증거를 인멸한 정황이 발각됐다.
또 ITC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75개 엑셀시트 중 1개를 제외한 74개에 대해 은밀히 자체 포렌식을 진행한 정황도 드러났다.
이에 따라 LG화학은 11월5일 ITC에게 SK이노베이션의 조기패소 판결을 요청했다.
LG화학은 “조기패소 판결이 내려질 정도로 공정한 소송을 방해한 SK이노베이션의 행위에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SK이노베이션에 대한 법적제재로 LG화학의 주장이 그대로 인정된 만큼 남아있는 소송절차에 끝까지 적극적이고 성실하게 임하겠다”고 밝혔다.
반면, SK이노베이션은 조기패소 판결과 관련해 “ITC로부터 공식적인 결정문을 받아 검토한 후 법적으로 정해진 이의절차를 진행할 방침”이라며 “LG화학과는 선의의 경쟁관계이지만 산업 생태계 발전을 위해 협력해야 할 파트너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밝혔다.
ITC가 2020년 10월 최종결정에서도 패소 판결을 유지하면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셀, 모듈, 팩, 관련 부품·소재의 미국 판매가 금지된다.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분쟁은 인력과 영업비밀 빼가기 논란에서 출발했다.
LG화학은 SK이노베이션이 LG화학 출신 임직원 76명을 채용하는 과정에서 2차전지 양산기술 및 핵심공정기술 등 주요 영업비밀이 유출됐다고 주장하며 2019년 4월 ITC와 델라웨어 지방법원에 SK이노베이션을 제소했고, 5월에는 산업기술 유출 혐의로 SK를 서울지방경찰청에 고소했다.
SK이노베이션은 LG화학의 소송에 맞서 2019년 6월 서울중앙지법에 명예훼손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고, 8월에는 미국 ITC와 연방법원에 특허 침해 혐의로 대응했다. SK이노베이션은 LG그룹 계열사들이 자사의 배터리 특허를 침해했다면서 LG화학과 LG전자, LG화학 미국 자회사를 미국 ITC 연방법원에 동시에 제소했다.
LG전자는 LG화학으로부터 배터리 셀을 공급받아 배터리 모듈과 팩을 생산해 특정 자동차기업 등에게 판매하고 있어 소송 대상에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LG화학은 SK이노베이션의 제소 예고 직후 성명문을 통해 SK이노베이션 측의 주장을 반박했다.
성명문에서는 LG화학이 30년에 걸쳐 LiB 기술을 연구했고 관련 특허만 2019년 3월 기준으로 1만6685건에 달함으로써 SK이노베이션의 1135건에 비해 10배 수준이라고 강조했다.
또 최근 수년 동안 연구개발(R&D) 투자를 강화하고 있으며 2018년 배터리 사업에만 3000억원 이상을 투자했지만 SK이노베이션은 2300억원을 투자하는데 그쳤다면서 기술개발에서도 앞서나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SK는 LG의 배터리 사업 경력사원 100여명을 채용한 것은 인정하면서도 100% 공개채용 방식이었고 부당하게 인력을 빼가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SK이노베이션은 영업비밀 침해 소송의 기본인 침해당한 영업비밀이 무엇인지 LG화학이 구체적으로 특정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오히려 경력직 채용은 공식 절차에 따라 진행했고 LG화학의 제소가 경쟁기업의 근거 없는 발목잡기라고 지적했다.
양사 최고경영자(CEO)가 2019년 9월 만났으나 합의를 끌어내지는 못했다. 모두 전기자동차 배터리를 미래 먹거리로 삼고 시장 선점에 사활을 걸고 있어 한 발도 양보하지 않고 팽팽하게 맞선 것으로 알려졌다.
사태는 LG화학이 2019년 11월 ITC에 SK이노베이션의 조기패소 판결을 내려달라고 요청하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되고 있다.
LG화학은 SK이노베이션이 자료 삭제를 지시하는 등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광범위한 증거인멸을 지속했고, 포렌식 명령도 이행하지 않았다며 강도 높은 제재를 내려달라고 요청했다.
ITC는 3개월만에 LG화학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ITC 불공정수입조사국(OUII)이 제출한 SK이노베이션의 증거인멸 정황을 인정한 의견서가 판결에 영향을 준 것으로 판단된다.
조기패소 판결은 양사가 진행하고 있는 배터리 소송 6건 가운데 처음으로 나온 예비판결로, 분쟁의 흐름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로서는 SK이노베이션이 불리한 입장이다.
ITC 통계자료(1996-2019년)에 따르면, 영업비밀 소송은 ITC 행정판사가 침해를 인정한 모든 사건(조기패소결정 포함)이 ITC 위원회 최종결정에서 그대로 유지됐고 특허소송은 90%가 ITC 위원회 최종결정으로 이어졌다. 배터리 영업비밀 침해 소송에서도 조기패소 판결 내용이 최종결정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
SK이노베이션이 최종 패소하면 미국 배터리 사업이 위기에 몰리는 만큼 조만간 LG화학 측과 합의를 시도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은 2조원을 들여 폭스바겐(Volkswagen)에게 공급할 배터리 공장을 미국 조지아에 건설하고 있어 최종 패소로 미국 내 SK이노베이션 배터리 부품·소재 수입이 금지되면 미국사업을 접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부에서 미국공장을 늘려 고용을 창출하려는 트럼프 행정부가 ITC 소송 결과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의견을 제기했으나 실현 가능성은 희박한 것으로 판단된다.
ITC 소송 전례에서도 최종결정 직전 양사 합의로 소송이 마무리되는 사례가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LG화학은 “소송의 본질은 30여년 동안 축적한 소중한 지식재산권을 정당한 방법으로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면서 “LG화학은 2차전지 관련 지식재산권 창출과 보호를 지속적으로 강화해 글로벌 전기자동차 배터리 시장을 선도해나가겠다”고 강조했다.
양사는 2011-2014년에도 세라믹 도포 분리막 관련 기술 도용과 관련해 국내와 미국에서 소송전을 벌인 바 있으며 당시에는 쌍방의 장기적인 성장을 위해 소송을 취하했다. (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