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이 반도체, 전기자동차(EV), 배터리 분야에서 거액의 투자를 잇달아 진행하고 있다.
미국 정부는 기후변화와 경제‧에너지 안보를 위해 대규모 보조금과 세제 우대 조치를 강화하며 투자 유치를 본격화하고 있다.
장기화하고 있는 중국과의 무역마찰이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촉발된 지정학적 리스크 확대와 맞물리면서 미국과 비 미국으로 구분되는 신냉전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반도체, 칩스법 통해 설비투자 유치 적극화
삼성전자는 미국 중서부 텍사스 테일러시(Taylor)에 반도체 공장을 건설하고 있다.
2024년 하반기 가동을 목표로 170억달러(약 23조원)를 투자하는 대규모 프로젝트로 5나노미터 이하 첨단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 공장)를 건설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바이든 행정부는 미국 반도체 및 과학법(칩스법: CHIPS & Science Act)을 통해 미국을 중심으로 한 반도체 공급망 형성에 나서고 있다.
칩스법에 따라 반도체 공장 혹은 연구개발(R&D) 센터를 건설하는 곳에게 5년간 총 527억달러(약 70조원)에 달하는 보조금을 지급하며 삼성전자 뿐만 아니라 인텔(Intel), 마이크론(Micron Technology),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exas Instruments), TSMC(Taiwan Semiconductor Manufacturing) 등 주요 반도체 관련기업들이 앞다투어 투자 계획을 공개했고 주정부들도 보조금을 활용해 유치에 속도를 내고 있다.
미국 반도체산업협회(SIA)에 따르면, 2022년 말 기준 미국에서 진행된 반도체 관련 투자액은 약 2000억달러에 달했다.
칩스법은 미국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지급받으면 10년 동안 중국에서 첨단 반도체 투자를 추진할 수 없도록 하는 가드레일 조항을 두고 있어 보조금 수혜기업들의 중국 사업이 경색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배터리, IRA 타고 현지 설비투자 가속화
미국은 반도체 뿐만 아니라 전기자동차와 배터리 서플라이체인도 미국 중심으로 재편하고 있다.
2022년 성립된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은 에너지 안보와 기후변화 대책을 위해 보조금 3910억달러를 지원하는 내용이며 전기자동차는 신차 구매자에게 최대 7500달러의 세제 공제 혜택을 부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보조금을 받기 위해서는 전기자동차를 북미에서 최종 조립했거나 배터리 소재 중 일정 비중을 미국 혹은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국가에서 조달해야 해 현재 관련 투자가 활기를 나타내고 있다.
테슬라(Tesla)는 네바다에서 대규모 배터리 공장인 기가팩토리를 가동하고 있으며 36억달러를 추가 투자할 예정이고 멕시코 북부 누에보레온주(Nuevo Leon)에 전기자동차 공장을 건설하기로 했다.
도요타자동차(Toyota Motor)는 미국과 일본에서 배터리 생산능력 확대에 최대 56억달러를 투자할 계획이다.
배터리 생산기업들도 투자를 가속화하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은 미국 제너럴모터스(GM)와의 합작기업 얼티엄셀즈를 통해 테네시에서 공장을 건설하고 있다. 23억달러(약 3조원)를 투자하며 생산능력을 당초 계획한 35GWh에서 50GWh로 확대할 계획이다.
삼성SDI는 스텔란티스(Stellantis)와 인디애나에 25억달러(약 3조1625억원) 이상을 투자해 배터리 공장을 건설하며 GM과 약 30억달러(약 4조원) 이상을 투자해 생산능력 30GWh 이상 합작 공장을 건설할 예정이다.
SK온은 현대자동차와 조지아에 35GWh 공장을 건설하고, 포드(Ford)와는 합작기업 블루오벌SK를 통해 켄터키, 테네시에 배터리 생산기지 3곳을 건설함으로써 1대당 105kWh 배터리가 들어가는 포드의 F-150 라이트닝 전기 픽업트럭을 약 120만대씩 생산할 수 있는 총 129GWh 체제를 확립할 방침이다.
배터리 소재 생산기업들도 북미 진출 및 투자 확대를 검토하고 있다.
SK아이이테크놀로지(SKIET)는 그동안 폴란드를 중심으로 유럽 투자에 주력했으나 IRA를 계기로 북미에 LiB(리튬이온전지) 분리막(LiBS) 공장을 건설하기 위한 검토에 돌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도 배터리, 배터리 소재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파나소닉(Panasonic)은 캔자스에 배터리 공장을 건설하며, 아사히카세이(Asahi Kasei)는 습식 분리막 공장 건설을 검토하고 있다. 도요잉크(Toyo Ink)는 미국, 중국에서 배터리용 도전조제 생산능력 확대를 준비하고 있다.
중국 CATL 역시 북미 배터리 공장 건설을 추진했으나 IRA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면서 포드가 미시간에 건설하는 배터리 공장에 기술을 제공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탈탄소 기술 분야에 3690억달러 투입
바이든 행정부는 기후변화 대책에 기여하는 차세대 기술에 대해서도 보조금을 지급할 예정이다.
IRA를 통해 2030년까지 온실가스 40% 감축을 목표로 친환경 에너지와 기후변화 대응 관련 분야에 3690억달러를 투자할 예정이며 IRA가 통과된 2022년 8월부터 2023년 2월 말 사이에만 청정에너지 관련 투자가 50건 정도 발표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산화탄소(CO2) 포집·저장·활용(CCUS), 청정 암모니아(Ammonia), 그린수소, 지속가능 항공연료(SAF) 공급 프로젝트 등이 주목되며 주로 일본기업들이 이름을 올리고 있다.
미츠비시(Mitsubishi)상사는 저탄소 연료 암모니아 공급을 주요 차세대 에너지 프로젝트로 추진하고 있으며 텍사스 에너지 수출기지인 코퍼스크리스티(Corpus Christi) 항만당국과 이산화탄소 포집·저장(CCS)를 활용한 저탄소 암모니아 생산기지 건설에 협력하고 있다. 2030년 가동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수요에 따라 생산능력을 확대할 가능성도 열어두고 있다.
미쓰이(Mitsui)물산은 세계 최대 암모니아 생산기업인 CF Industries와 루이지애나에 세계 최대 블루 암모니아 플랜트를 건설할 예정이다. 2027년 상업가동을 목표로 100만-120만톤을 상업화하며 2023년 중반 최종 투자 결정을 내릴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스타트업 투자 부진에도 호조 유지
최근 경기침체로 스타트업 투자가 부진한 가운데 미국은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은 것으로 파악된다.
2022년 세계적인 기준금리 인상 행렬과 경기침체 가속화로 스타트업 투자가 감소했으나 탈탄소 분야는 투자액이 오히려 늘어 기존 스타트업 투자를 주도했던 헬스케어 스타트업과 비슷한 수준으로 성장했다.
전미 벤처캐피탈협회(NVCA)에 따르면, 2022년 벤처캐피탈(VC)의 미국 투자액은 2383억달러(약 320조원)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한 2021년의 3447억달러 대비 30.9% 감소했고 투자건수도 1만5852건으로 14.4% 줄었다. 매분기 감소 추세가 이어졌고 4분기 투자액은 362억달러로 1분기 798억달러 대비 절반 수준으로 급감했다.
엔젤, 시드 단계 스타트업 투자는 비교적 양호한 수준을 나타냈으나 얼리, 레이터 등 단계가 올라갈수록 자금 조달에 고전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주식공개(IPO), M&A(인수합병), 출구전략 관련 투자액은 714억달러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한 2021년 7532억달러의 10%에도 미치지 못했으며 4분기에는 출구전략 투자액이 52억달러로 사상 최저치를 갱신했다.
2023년 3월에는 스타트업에게 적극적으로 투자해온 실리콘밸리은행(SVB)이 파산했고, 특히 미국 은행이 파산한 역사상 2번째 대규모 파산이었기 때문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실리콘밸리은행은 금리 인상으로 채권 매각 손실이 발생함에 따라 파산을 피하지 못한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탈탄소 기술을 개발하는 스타트업들은 2022년에도 호조를 유지했고 2023년 이후로도 투자금 유치에 큰 문제를 겪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탈탄소 기술로는 이산화탄소를 포집하는 DAC(Direct Air Capture), 이산화탄소를 가시화하는 소프트웨어 기술, CCUS, 리사이클 등이 주목받고 있다.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이 설립한 스타트업으로 DAC 기술을 보유한 버독스(Verdox)는 2022년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창립자가 설립한 브레이크스루 에너지 벤처스(BEV)로부터 8000만달러(약 961억원)의 투자금을 유치했고 미국 전체로도 탈탄소 분야 투자액만 따지면 10% 이상 증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탈탄소, 일본과 기술 협력 본격화
미국은 이미 CR(Chemical Recycle) 기술에 강점을 갖추고 있으며 IRA를 통해 CCUS 등 탈탄소 기술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고 일본과의 연계 강화에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
소재‧화학 분야에 특화된 일본 벤처캐피탈 UMI는 IRA를 계기로 2023년 3호 펀드와 탈탄소 관련 기술에 투자하는 자매펀드를 통해 바이오 기술, 리사이클 및 자원 회수, CCUS를 중심으로 국내외 스타트업 투자를 확대할 예정이다.
아사히카세이는 미국 제노마티카(Genomatica)와 자동차부품용 PA(Polyamide) 66 원료를 식물 베이스 성분으로 전환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카오(Kao)는 세제와 화장품용 팜유를 대체하는 식물 베이스 원료 상업화에 도전하는 스타트업에 출자했다. 제노마티카와 유니레버(Unilever)로부터 투자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세키스이케미칼(Sekisui Chemical)은 미국 란자테크(LanzaTech)와 공동 개발한 기술을 바탕으로 음식물 쓰레기 등을 원료로 에탄올(Ethanol)을 생산하기 위한 실증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스미토모케미칼(Sumitomo Chemical)은 미국 뉴라이트테크놀로지(Newlight Technologies)와 이산화탄소 감축량을 배출량보다 늘릴 수 있는 카본 네거티브 플래스틱 소재를 개발하고 있다.
헬스케어‧의약품, 코로나 특수 종료에도 투자 호조
헬스케어 분야도 투자가 활발히 이어지고 있다.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백신 및 치료제 연구개발이 발전되며 2021년에는 미국의 헬스케어 투자액이 283억달러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고 2022년 218억달러로 감소했으나 2020년 대비 30.0% 증가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의약품 분야에서는 핵산 의약품, mRNA 의약품, 유전자‧세포 치료 등 치료수단 다양화에 따라 연구개발 투자가 확대되고 있다. 게임체인저가 될 혁신 기술이 아직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에 앞으로도 몇 년은 투자 확대 흐름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다케다약품(Takeda Pharmaceutical)은 RNA를 표적으로 삼는 저분자 의약품 개발, 단백질 분해, 비 바이러스성 표적 딜리버리 기술 등에서 투자 기회를 모색하고 있으며 화학기업들은 의약품에 이어 의료기기, 디지털 헬스 분야에서 벤처 투자를 적극화하고 있다.
미쓰이케미칼(Mitsui Chemicals)은 2023년 3월 CVC(Corporate Venture Capital) 펀드를 통해 인공 어깨관절을 개발하고 있는 숄더이노베이션(Shoulder Innovations)에게 출자했다. (강윤화 책임기자: kyh@chemlocu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