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 화학산업이 구조조정에 속도를 내고 있다.
유럽은 에너지 코스트 급등, 수요 둔화, 격화되는 글로벌 경쟁 등이 가중되면서 범용 화학제품을 중심으로 수입 의존이 심화되고 수업이 증가하고 가동률이 70%대로 추락했다. 스팀 크래커를 포함해 설비 가동중단과 폐쇄가 잇따르면서 유럽 자급체제는 구시대의 산물이 되고 있다.
다만, 유럽 화학산업은 지속가능성과 가치 창출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고 있으며, 위기 속에서도 지속가능한 미래를 목표로 도전을 이어가고 있다.
유럽연합(EU)는 205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 넷제로를 추진하는 유럽 그린딜(EGD: European Green Deal) 목표를 유지하고 있으며, 산업계의 규제 대응 부담을 경감하고 투자를 촉진하는 청청산업딜(CID: Clean Industrial Deal)을 새롭게 제안하고 있다.
EU, 글로벌 공급과잉으로 가동률 추락
유럽은 글로벌 공급과잉 영향으로 고전하고 있다.
중국이 석유화학 생산능력을 빠르게 확대하는 가운데 경기침체 등으로 수요가 따라가지 못하면서 저가 범용제품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에너지 코스트가 상승하면서 경쟁력을 잃은 유럽에 유입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 석유화학 가동률은 2018-2023년 3% 하락해 2024년 기준 약 75% 수준에 머물렀고 유럽은 2022년 하반기 80%가 붕괴돼 2024년 74%까지 하락했다.
유럽은 범용 석유화학제품과 무기화학제품 수입이 폭증하면서 밸류체인을 지탱하던 기반이 흔들렸고 2023-2024년에만 연평균 1100만개 이상의 공장 폐쇄가 발표됐다.
정유공장 폐쇄가 잇따르며 큐멘(Cumene), 스타이렌(Styrene), 에틸벤젠(Ethylbenzene)을 비롯해 TDI(Toluene Diisocyanate) 등 유기 방향족 화합물이 전체 생산능력 축소의 41%를 차지했다.
스팀 크래커 가동중단도 계속되고 있다.
이태리에서는 베르살리스(Versalis)가, 네덜란드는 사빅(Sabic)이, 프랑스는 엑손모빌(ExxonMobil)이 이미 가동중단을 결정했으며 2025년 들어서도 토탈에너지스(Total Energies)가 벨기에 앤트워프(Antwerp) 크래커 일부를 2027년 말까지 폐쇄한다고 발표했다. 다우(Dow)는 독일공장 가동중단·폐쇄를 검토하고 있으며, 라이온델바젤(LyondellBasell) 역시 전략을 재검토하고 있다.
폴리머 생산기업들도 연쇄적으로 생산능력을 축소하고 있다.
산업정책, 규제 주도형 트렌드가 경쟁력 훼손
환경·건강 관련 규제는 유럽의 산업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대표적인 요인으로 꼽히고 있다.
과거 REACH(화학물질 등록·평가·승인·제한 규정)와 PFAS(Polyfluoroalkyl Substance) 규제 등 강력한 법체계는 시장의 신뢰성을 높이고 소비자와 근로자를 보호하는 제도로 기능하며 유럽이 글로벌 리더십을 발휘하는 근거로 작용했다.
하지만, 최근 몇년 사이 규제의 복잡성과 불확실성이 현저하게 증가하면서 막대한 컴플라이언스 코스트가 화학기업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규제 관련 코스트는 20년 동안 지속적으로 증가했으며, EU 차원의 규제 강화 뿐만 아니라 회원국 간 운영 차이도 부담 증가를 부추기고 있다.
2016년 유럽위원회(EC) 의뢰로 실시한 누적 코스트 평가에 따르면, 규제 관련 코스트는 2004-2014년 연평균 100억유로 수준으로 꾸준히 상승해 현재는 전체 부가가치의 12-13% 수준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 자본투자 가운데 규제 대응 비중이 최대 10%에 달해 성장투자를 압박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엄격한 규제는 산업계의 혁신도 저해하고 있다. 확장 과정에서 수많은 행정장벽과 불확실성에 직면하면서 투자 결정이 지연되고 투자처를 다른 지역으로 전환할 위험을 높이기 때문이다.
청정산업딜, 탈탄소와 경쟁력 강화 “두마리 토끼”
2기 우즈줄라 폰데라이언(유럽위원회 위원장) 체제는 산업 경쟁력 강화를 최우선 과제로 추진하고 있다.
유럽위원회는 2025년 2월 경쟁력 강화와 탈탄소 양립을 목표로 하는 CID를 발표했다.
특히, 2050년 기후중립 목표를 유지하면서 기술중립 원칙에 입각해 에너지 다소비 산업에 대한 지원과 청정기술(Clean Tech) 산업에 대한 중점 지원을 내세우고 있다.
EC 산업정책 부문은 CID를 시작으로 철강, 시멘트, 화학, 비철금속 등 기초산업의 경쟁력을 재구축할 방침이며, 화학산업은 유럽 경제 전반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2025년 말까지 화학산업 패키지로 묶어 포괄적 지원책과 규제 간소화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정책 프레임워크를 마련할 계획이다.
2023년 2월 산업계 단체 및 대기업들이 주도한 앤트워프 선언(The Antwerp Declaration for a European Industrial Deal)의 요구에 부응하는 정책으로 산업용 에너지 가격 안정화, 인프라 확충을 위한 관·민 투자, 규제 투명성 확보, 기술 도입 지원 등 10개 항목에 대한 구체안이 제시됐다.
EC는 산업계와의 대화를 통해 실효성 있는 정책을 수립할 계획이다.
유럽 최대급 종합 화학 클러스터인 앤트워프항을 보유한 벨기에 플란데런(Flanders) 정부에 따르면, 플란데런 지역에 대한 외국인직접투자(FDI)는 2024년 사상 최대인 54억유로(약 8조7500억원)에 달했다.
특히, 연구개발(R&D) 투자가 늘었으며 반도체, 재활용, 화학제품에 대한 투자가 급증했다.
미국 Freepoint Eco-Systems가 헨트(Gent) 항구 지역에 폐플래스틱 CR(Chemical Recycle) 공장 건설을 결정했으며, 프랑스 에어리퀴드(Air Liquide) 역시 그린수소 생산을 위한 시험설비를 건설하는 등 지속가능성 향상 관련 투자가 두드러졌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에너지 코스트 급등으로 직격탄을 맞은 독일은 재생가능에너지를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독일은 이미 전력의 약 50%를 재생에너지로 충당하고 있으나 풍력은 북부에, 태양광은 남부에 집중돼 산업 클러스터가 위치한 지역에 대용량 송전망이 부족했고 독일 정부는 남북을 연결하는 525kV 고압 송전선을 설치하는 등 송전용량 확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독일은 송전망을 노르웨이 톤스타드(Tonstad) 양수발전소와 독일을 연결하는 600킬로미터 송전 케이블과도 연결할 계획이다.
현재는 노르웨이에서 전력을 공급받고 있으나 남북 송전이 원활해지면 독일에서 잉여전력을 보내 저장에 활용함으로써 에너지 코스트 하락과 이웃나라 의존에서 벗어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스팀크래커, 제로에미션 추진
유럽은 스팀 크래커의 제로에미션(Zero Emission)화를 추진하고 있다.
나프타(Naphtha), 에탄(Ethane)을 원료로 올레핀 등을 생산하는 스팀 크래커는 기초화학제품 생산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나 섭씨 약 850도 고온으로 가동하며 화석연료를 대량으로 소모하기 때문에 화학산업의 주요 이산화탄소(CO2) 배출원으로 지탄받고 있다.
영국 이네오스(Ineos)는 프로젝트 원(Project ONE)이라는 이름으로 최신식 에탄 크래커를 앤트워프항에 건설하고 있다. 에틸렌(Ethylene) 생산능력은 145만톤으로 총 공사비가 40억유로를 초과하고 2026년 가동 예정이다.
프로젝트 원은 에탄을 열분해할 때 부생하는 수소를 연료로 회수·활용해 가열 에너지의 약 60%를 충당할 예정이며 기존 화
석연료 설비와 비교하면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최대 60%까지 감축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원료는 앤트워프항의 전용 설비를 통해 미국에서 채취한 셰일(Shale) 가스를 액화한 에탄을 공급받을 계획이다.
또 전체 설비는 100% 수소 연소 운전에도 대응 가능하도록 설계돼 재생에너지 베이스 그린수소가 안정적으로 공급되면 열원을 전면 전환할 방침이다.
건설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으며 앤트워프 현장에는 이미 핵심 부문인 에탄 크래커 2기를 포함한 모듈이 도착했다. 나머지 4기도 2025년 도착할 예정이며 2025년 상반기까지 총 30억유로 이상을 투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네오스는 이산화탄소 포집·저장(CCS) 사업에도 진출했다. 덴마크 북해(North Sea) 해저 폐유전을 활용한 그린샌드(Greesand Future) 프로젝트를 주도하며 공장에서 배출된 이산화탄소를 실증적으로 저장하고 있다.
앤트워프항에서 추진하고 있는 이산화탄소 포집 프로젝트와 연결하면 프로젝트 원의 저탄소화가 가속화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윤우성 선임기자: yys@chemlocu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