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가 석유화학산업 위기에 대응해 자율적인 사업구조 재편을 촉구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8월20일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주재로 산업 경쟁력 강화 관계장관회의를 열고 석유화학산업의 △과잉설비 감축 및 고부가 스페셜티 전환 △재무 건전성 확보 △지역경제·고용 영향 최소화 등 구조개편 3대 방향을 제시했다.
△3개 석유화학단지 대상 동시 구조개편 추진 △충분한 자구노력 및 타당성 있는 사업재편 계획 마련 △종합 지원 패키지 마련이라는 정부 지원 3대 원칙도 내놓았다.
공급과잉 해소를 위해 적극적으로 생산 감축에 나서면 맞춤형 지원을 하고 무임승차는 지원 대상에서 제외하는 등 단호하게 대처할 방침이며 LG화학, 롯데케미칼, SK지오센트릭, 한화토탈, 대한유화, 한화솔루션, DL케미칼, GS칼텍스, HD현대케미칼, 에쓰오일 등 석유화학 10사는 8월20일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사업재편 자율협약식을 열고 구조조정 의지를 밝혔다.
여천NCC, 급한 불 껐으나 재무위기 여전
여천NCC는 8월8일 여수 No.3 NCC(Naphtha Cracking Center) 가동을 중단했다.
공급과잉과 글로벌 경제 위축에 따른 시황 악화가 원인이며 재가동 여부는 시황에 따라 결정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여천NCC는 여수에서 NCC 3기를 가동하고 있으며 에틸렌(Ethylene) 생산능력이 228만5000톤으로 국내 3위에 올라 있다. No.3 크래커는 여천NCC 전체 생산능력의 약 20.6%를 차지하며 매출은 약 1조3000억원 수준으로 추정된다.
여천NCC는 2019-2021년 영업이익이 매년 3000억원을 넘었으나 중국·한국의 신증설에 따른 공급과잉과 글로벌 경기 침체로 수익성이 악화되면서 2022년 마이너스 3867억원으로 영업적자를 기록한데 이어 2023년 마이너스 2388억원, 2024년 마이너스 1503억원으로 적자행진을 이어갔고 2025년 1분기에도 영업적자가 498억원에 달했다.
8월 중순에는 디폴트(채무불이행) 위기에 빠지면서 모기업인 한화그룹과 DL그룹이 자금 지원을 놓고 비방전을 벌이는 상황이 벌어졌다.
다행히 한화가 추가 자금 대여 1500억원을 승인하고, DL도 1500억원의 자금 대여를 결정하면서 가까스로 부도 위기에서 벗어났으나 공급과잉에 따른 영업 부진 장기화로 앞날이 불확실한 상태이다.
국내 석유화학산업은 제2의 여천NCC 사태를 우려하고 있으며, 버티기에 돌입한 석유화학산업 전반에 대한 경계심이 커지고 있다.
특히, 불안한 업황에도 그룹을 믿고 회사채를 발행하던 회사채 시장의 신뢰가 깨지면서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정부, 사즉생 각오로 에틸렌 370만톤 감축 주문
정부는 자구노력을 지켜본 후 지원하겠다는 방침을 강조하며 사즉생의 각오로 임할 것을 촉구했다.
구윤철 부총리는 8월20일 열린 산업 경쟁력 강화 관계장관회의에서 “석유화학산업이 직면한 문제는 명약관화하나 국내기업들은 그동안 문제를 외면해왔다”고 질책했다. 예고된 글로벌 공급과잉에도 과거 호황에 취해 설비를 증설했고 고부가 전환까지 실기했다는 것이다.
정부는 석유화학산업 위기의 근본 원인으로 꼽히는 공급과잉 문제 해소를 위해 에틸렌 생산능력 기준 270만-370만톤의 NCC를 감축할 것을 요구했다.
국내 에틸렌 생산능력은 2025년 6월 기준 1301만2000톤이며 현재 신증설하고 있는 프로젝트를 포함하면 1470만톤에 달해 18-25%를 감축해야 한다.
산업통상자원부와 석유화학기업들은 2025년 말까지 구체적 사업재편 계획을 제출하는 협약을 체결하고 구조조정 논의를 본격화하고 있다.
그러나 상호 이해관계가 엇갈려 감축 목표, 시한 등을 지킬 수 있을지 의문시된다.
정부가 구체적인 감축 대상을 정하지 않고 개별기업 차원에서 사업재편 계획을 제시하면 맞춤형 지원 패키지를 제공한다는 방침을 밝혔으나 실효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정부는 석유화학산업의 생존과 글로벌 경쟁력 강화를 위해 선택과 집중을 기본으로 생산능력 감축과 동시에 고부가·친환경 전환을 적극 지원할 방침이다.
석유화학, 100일도 안 남은 크리스마스
석유화학기업들이 구체적인 사업재편 계획을 내기로 협약을 체결했지만 아무 성과 없이 1개월이 지났다.
석유화학과 정유의 수직계열화 추진이 큰 흐름을 형성하고 있으나 자율 협상 원칙 속 물밑 논의에서 입장 차만 확인하고 있으며 일부는 논의 자체에도 소극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협상 촉매 역할을 할 정부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끊이지 않고 있다.
여수, 대산, 울산 등 국내 3대 석유화학단지에서는 8월20일 구조개편 협약 이후 단지별 정유기업을 중심으로 석유화학기업의 통합 제안이 활발히 오가고 있다.
특히, 나프타(Naphtha) 가격 경쟁력 확보와 설비 합리화를 통해 NCC 조절 가능성을 고려해 구조조정 논의 초기부터 수직계열화가 핵심 방안으로 거론되고 있다.
여수단지에서는 LG화학이 GS칼텍스에게 여수 NCC를 매각하고 합작기업을 설립해 NCC를 통합 운영하자는 제안을 했고, 롯데케미칼도 수직계열화 파트너로 GS칼텍스를 염두에 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GS칼텍스는 정유 사업이 중심이어서 석유화학기업들과의 통합 논의에 상대적으로 소극적이며 시간을 두고 다양한 방안을 검토할 방침이다.
대산에서는 롯데케미칼이 NCC를 HD현대케미칼로 통합하고 HD현대케미칼 모기업인 HD현대오일뱅크가 추가 출자하는 방식을 추진하고 있다.
울산에서는 SK에너지에서 나프타를 공급받는 SK지오센트릭과 대한유화가 NCC를 통합함으로써 수직계열화를 이루는 구상이 거론되고 있으나 대한유화가 자금 문제로 SK지오센트릭 인수에 난색을 표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수직계열화 뿐만 아니라 석유화학기업 간 수평적 통합을 위한 빅딜 논의도 이어지고 있다.
에틸렌 생산 국내 2위, 3위인 롯데케미칼과 여천NCC의 통합 가능성이 대표적으로 거론되고 있다.
롯데케미칼은 123만톤, 여천NCC는 228만톤의 에틸렌 생산능력을 보유하고 있어 통합 효과가 클 것으로 예상되나 한화솔루션과 DL케미칼이 지분을 50%씩 보유한 여천NCC의 지배 구조가 논의에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정부가 경쟁기업들의 설비 감축 혜택만 누리려는 무임승차에 단호히 대응한다는 방침을 밝혔음에도 일부는 논의에서 한발 물러서 있다. 사업 구조 및 재정 상황에 따라 구조조정 필요성에 차이가 있으며 외국계 또는 합작기업은 본사의 전략 결정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석유화학 관계자는 “적어도 추석 연휴가 지나야 협상 결과가 윤곽을 드러낼 것”이라고 예상했다.
선 자구노력-후 지원 원칙을 천명한 정부에 대한 추가 지원 요청도 이어지고 있다. 더 구체적인 정책적 지원이 있어야 논의가 속도를 낼 것이며 정부도 적극적인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 2030년 에틸렌 생산능력 9600만톤으로 확장
아시아 석유화학 시장은 지각 변동이 진행되고 있다.
최대 소비지로 기능하던 중국이 에틸렌 신증설을 계속하는 가운데 후발주자들도 신규 건설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수급밸런스가 악화되면서 가동중단 및 생산능력 최적화에 나서는 국가들이 나오고 있으며 심지어 최근 완공한 설비의 가동을 미루거나 중단하는 사례도 관찰되고 있다.
중국은 2015년 중국제조 2025 전략을 발표한 이후 대대적인 산업 경쟁력 강화에 나서고 있으며, 특히 석유화학제품 생산을 크게 확대하고 있다.
중국 석유‧화학공업연합회(CPCIF)에 따르면, 중국은 에틸렌 생산능력을 2026년 7325만톤, 2030년 9600만톤으로 확대하고 2030년대 1억톤을 달성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타이완 석유화학협회(PIAT) 역시 중국 에틸렌 생산능력이 2025년 780만톤 증가함으로써 총 6000만톤을 돌파하고 6년만에 2배 확대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실제로 2025년 들어 이미 미국 엑손모빌(ExxonMobil)과 완후아케미칼(Wanhua Chemical)이 잇따라 대형 에틸렌 크래커를 가동했으며 12월까지 100만톤 이상을 추가 가동할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은 석유화학제품 내수 증가를 기대하고 있으나 경기 둔화에 따른 부진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 플래스틱산업협회(JPIF)에 따르면, 중국은 2024년 플래스틱 수입량이 2898만톤, 수출량이 2565만톤으로 순수입이 333만톤으로 크게 감소했다.
내수 침체와 생산능력 확대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과잉 생산물량을 수출하고 있으며 중국의 밀어내기 수출로 아시아 각국의 에틸렌 가동률이 급락하고 있다.
한국은 2024년 평균 가동률이 80.3%로 90%를 밑돌았고, 일본은 3년 연속 90% 미만에 머물렀을 뿐만 아니라 최근 1년간은 실질적으로 70%대를 유지한 것으로 파악된다. 동남아 역시 타이완이 64.8%, 타이는 75.4%로 심각한 수준으로 알려졌다.
아시아 국가들 역시 내수가 감소해 석유화학 가동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수출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나 중국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생산되는 셰일(Shale) 베이스 석유화학제품이 유입되면서 수급밸런스 붕괴가 가속화되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
샤힌·라인, 아시아 공급과잉 심화 우려
그러나 아시아 국가들은 여전히 에틸렌 생산능력을 확대하고 있다.
아람코(Saudi Aramco)는 에쓰오일을 통해 울산에서 2026년 완공을 목표로 샤힌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샤힌은 에쓰오일이 국내 석유화학 사상 최대 투자액인 약 9조3000억원을 투입하는 고부가가치 석유화학 생산설비 건설 프로젝트로 에틸렌 생산능력이 180만톤에 달하며, 아람코와 미국 러머스(Lummus Technology)가 개발한 저부가가치 연료유를 나프타(Naphtha)로 전환하는 T2C2(Thermal Crude to Chemical) 기술을 적용해 생산비용을 낮춤으로써 경쟁력을 확보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다만, 유도제품은 PE(Polyethylene)만 생산하고 나머지 에틸렌은 외부에 공급하고 프로필렌(Propylene)은 유도제품 생
산 계획이 없다는 점에서 공급과잉을 심화시킬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특히, 국내 뿐만 아니라 아시아 석유화학 시장 대부분이 포화 상태에 빠진 상황을 고려할 때 T2C2로 가격 경쟁력을 확보해도 수요처를 확보할 수 있을지 의문시되고 있다.
롯데케미칼은 인도네시아에 건설하고 있는 라인 프로젝트를 10월 상업 가동할 예정이다.
라인 프로젝트는 롯데케미칼이 LCI(Lotte Chemical Indonesia)를 통해 인도네시아 반텐(Banten)에 에틸렌 100만톤, 프로필렌 52만톤, PP(Polypropylene) 25만톤 플랜트 등을 건설하는 프로젝트로 투자액이 총 39억달러(약 5조4500억원)에 달한다.
SCG, 롱손 프로젝트 가동 중단
시장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는 가운데 가동중단 및 생산능력 축소에 나서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필리핀 JG Summit Petrochemical은 2025년 에틸렌을 비롯한 석유화학 생산설비 가동을 무기한 중단한다고 발표했고, 타이 SCG(Siam Cement Group) 역시 베트남 남부 롱손(Longson) 석유화학단지 가동을 2024년 10월부터 중단했다.
JG Summit은 2023년 증설 프로젝트를, SCG 롱손 석유화학단지는 2024년 신규 건설을 완료하고 가동했으나 가동 직후 석유화학 수급밸런스 악화로 직격타를 맞은 것으로 파악된다.
다만, SCG는 8월 말부터 롱손단지를 재가동한 것으로 알려졌다.
동남아 최대의 에너지·화학산업 클러스터를 보유한 싱가폴 역시 시장 구도가 재편되고 있다.
영국 쉘(Shell)은 2025년 초 주롱(Jurong)섬에 위치한 정유공장과 석유화학 플랜트를 인도네시아 최대 화학기업인 CAP(Chandra Asri Pacific)와 스위스 무역기업 글렌코어(Glencore)의 합작기업 Aster Chemical & Energy에게 매각했다.
싱가폴은 2019년 세계 최초로 탄소세를 도입하는 등 탈탄소 정책이 석유화학산업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코스트가 높은 편으로 파악된다. (윤우성 선임기자: yys@chemlocu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