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석유화학산업이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에틸렌(NCC) 생산능력을 최대 25% 감축하기로 정부와 약속했다고 한다. NCC를 가동하고 있는 석유화학기업들이 합의한 내용이니 일단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정부가 개별 석유화학기업의 구조조정 대책을 살펴본 후 선별적으로 금융 지원과 법적·제도적 규제를 완화하겠다고 밝혀 쉽지 않다. 석유화학산업 전체적으로도 구조조정안에 합의해야 하고, 자체적으로도 안을 내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얼렁뚱땅 넘어가기는 어려운 국면이다. 석유화학기업들은 정부가 금융·제도 지원안을 내놓은 후 구조조정을 유도할 것으로 예상했을 터인데 크게 어긋나고 있다. 정부는 일방적 지원으로는 구조조정에 성공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근본적인 대책을 요구하고 있다.
특히, 특정 석유화학기업과 대주주가 충분한 자구노력을 제시해야 세제, 금융, 규제 완화 지원 패키지를 제공할 수 있다는 단서를 달았다. 대주주의 유상증자와 사재 출연을 포함한 의지를 강조하고 있고, 고용을 건드리지 않겠다는 약속도 요구하고 있다.
금융위원회는 석유화학산업의 자율적 구조조정에 앞서 개별기업별·단지별 생산능력 감축 목표를 요구하고 있고, 9월 은행연합회 주도로 채권은행과 협약을 맺은 후 실사를 벌여 구조조정 의지를 평가하겠다는 입장이어서 쉽지 않다.
문제는 에틸렌 생산능력을 어느 기준으로 감축할 것이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경쟁력을 좌우할 수 있는 기준이 생산능력 크기인지, 가동연도인지, 효율성인지, NCC 숫자인지 모든 것이 모호하기 이를 데 없다. 또 25% 자율 감축을 요구하고 있으나 울산, 여수, 대산 등 단지별 생산능력 감축을 요구하는 것인지, 단지와 상관없이 석유화학기업별로 결정해야 하는지 불분명하다.
자율적 구조조정을 추진할 단체나 협의체가 없다는 것도 문제이다. 석유화학협회가 존재해도 어려운 판에 화학산업협회가 구조조정을 조율할 권한이나 능력이 있을 리 만무하고, 그렇다고 산업통상자원부가 나서는 것도 적합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더 큰 문제는 석유화학산업 자율 구조조정을 발표한 석유화학기업 대표들은 어떠한 권한도 없다는 사실이다. 1970년대 말 석유화학 투자 자율화를 실시할 때도 명망 있는 대표들이 조정에 나섰지만 그룹의 눈치를 보느라 어떠한 결정도 내리지 못한 경험이 있다.
결국, 석유화학기업의 경영을 지배하고 있는 그룹 회장이 나서서 결정해야 하나 지체 높은 분들이 직접 나서기를 꺼릴 것이 분명하다. 한화솔루션과 DL케미칼이 합작기업 여천NCC의 부도를 막아야 한다며 난타전을 벌일 때도 회장님들은 뒤에 숨어 있기에 급급했다. 상대방이 결정적 어려움에 처해 양보안을 내놓기를 기다릴 뿐 선의의 해결책을 내놓을 의사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대주주들에게 10조원이 넘는 석유화학기업의 회사채·기업어음(CP) 등 차입금 해소를 압박하고 있으나 회장님들은 눈 하나 끄떡하지 않을 것이다. 정권은 길어야 5년에 불과하나 경영 지배권은 영원하다며 차라리 배 째라고 큰소리칠 수도 있다.
정부가 석유화학기업들이 요구한 공정거래법의 독과점·담합 규정 예외 적용, 전기료 감면, 보조금 지급 등을 대책에 포함하지 않은 것은 참으로 잘한 선택으로 평가된다. 형식적 구조조정을 유도할 수는 있으나 실질적 개혁은 실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석유화학기업들은 국가에 무엇인가 바라기 전에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숙고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