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석유화학기업들이 석유화학산업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고 있다.
글로벌 석유화학 시장이 아시아를 중심으로 공급과잉의 늪에 빠져 수익성이 극도로 악화되고 있으니 정부에 특별법을 제정해서라도 생존을 담보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석유화학기업들이 석유화학산업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개선할 것이라며 요구하고 있는 특별법이 사업 고도화나 과감한 투자를 단행할 방안이 아니라 적자를 줄이기 위한 임시방편 대책이라면 정부가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도 특별법을 제정해서라도 산업용 전기요금을 인하해주는 것은 물론 고부가가치·친환경 화학제품에 투자한다며 세제 감면을 강요하고, 연구개발(R&D) 확대에 금융 지원을 촉구하고 있는 것은 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산업용 전기요금이 3년 동안 70-80% 올라 부담이 되는 것은 인정하지만 중소기업도 부담하고 있는 전기요금을 깎아달라는 것은 무리가 있다. 전기요금이 턱없이 낮을 때 펑펑 쓰던 버릇을 고치지 않고 인하만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민간·상업용 전기요금을 크게 인상할 수 없자 산업용 전기요금에 덤터기를 씌운 것은 사실이나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인지는 검증이 필요하다.
고부가·친환경 화학제품 개발도 마찬가지이다. 20-30년 전부터 차별제품을 개발해 경쟁력을 강화할 것을 요구했으나 아무런 개발실적을 올리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뒤늦게 고부가·친환경을 외치는 자체가 모순이다. 연구개발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혁신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고 확신한다.
특히, 공정거래법상 공동행위 적용에서 제외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파렴치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국내 석유화학기업들은 1994년 3월27일부터 시행한 합성수지 가격 및 수급 담합을 모두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당시 삼성그룹과 현대그룹이 석유화학 사업에 뛰어들어 공급과잉이 심해지고 적자가 확대되자 공정거래위원회의 묵인 아래 산업통상자원부 주도로 합성수지 카르텔을 실행한 바 있다.
이후 석유화학기업들의 적자가 줄어들고 곧 흑자로 돌아섬은 물론 중국이 고도성장을 타고 수입을 확대함으로써 엄청난 수익을 올려 1997년부터 대대적 투자를 단행했고 30년 가까이 지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당시에는 중국의 수입 수요가 많아 문제가 없었으나 최근 들어서는 중국이 수입을 줄이고 수출에 나섬으로써 적자를 감내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중국 화학기업들은 코스트보다는 판매가 목적이어서 저가 공세도 불문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국내 석유화학기업들이 고부가·친환경 화학제품 투자는 외면하고 범용 위주로 확대했다는 것이다. 중국이 신증설을 통해 생산을 확대하고 있는 가운데 경기 침체가 겹쳐 수출을 적극화하고 있는 것이 직접 작용했으나 사실은 범용 위주로 투자함으로써 중국과 경쟁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근본적 원인은 1994년 합성수지 가격·수급 담합을 허용함으로써 노력이나 혁신과는 상관없이 수익을 올릴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고, 당시의 거래처 지정을 오래도록 유지함으로써 국내에는 비싸게 공급하고 해외에는 시세에 따라 수출함으로써 수익성을 담보해주었다는 것이다.
국내 석유화학기업들은 1994년 합성수지 가격·수급 카르텔이 범용 투자를 장려하는 역할과 함께 상시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구조를 정착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도 어렵겠지만 부인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런데도 장기간에 걸친 악습을 고치려는 노력은 외면한 채 또다시 카르텔을 허용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고 결코 받아들여서도 아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