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석유화학기업들이 불황에 허덕이고 있다.
중국 수출이 예상을 밑돌고 있기 때문이다. 2020년 하반기부터 중국이 코로나19 사태에서 벗어나면서 호황을 맛보았으나 제로코로나 정책을 고집하면서 이동을 제한하는 등 규제를 강화함으로써 자동차, 전자, 건설·건축, 섬유 등 석유화학 수요산업이 위축된 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중국 수요를 믿고 신증설에 치중한 판단 잘못이 원인이다. 국내수요가 생산량의 30% 수준에 그친 가운데서도 중국이 고도성장을 장기화할 것으로 믿고 무작정 신증설함으로써 공급과잉을 부른 것이 화근이라는 것이다. 중국이 10% 안팎의 고도성장을 계속할 것으로 믿은 것은 착각이고, 3% 수준의 성장률을 유지하는 것도 힘들다는 것이다.
국내 석유화학산업은 올레핀과 아로마틱을 중심으로 한 기초유분과 중간원료, 그리고 합성수지, 합섬원료, 합성고무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다. 나프타나 LPG를 원료로 기초유분을 생산한 후 3대 다운스트림으로 확장했으나 원료 코스트가 지나치게 높아 경쟁력을 확보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석유화학기업들은 아직도 범용제품 생산에 집중하고 있다.
누누이 강조한 바 있지만 전자소재, 반도체용 화학제품, 자동차 소재 등으로 확장함으로써 차별화와 고부가가치화를 서둘렀어야 한데도 후진적 연구개발에 머무르고 경영진의 판단 착오가 겹쳐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지금도 백화점에서 플래스틱 가공제품을 둘러보면 한국산은 저가에, 독일산을 중심으로 한 유럽산은 고가에 거래되고 있다. 국내 소비자들의 눈이 높아져 한국산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다고 한다.
세계 석유화학 생산 4대 강국이라는 한국이 아직도 플래스틱제품을 수입에 의존하는 것이 현실이다. 저가제품은 중국산이, 고가제품은 유럽산이 장악하고 있다. 석유화학기업과 플래스틱 가공기업이 협업을 통해 고급제품을 개발해도 부족한 판에 상호 장삿속으로만 거래하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삼성전자가 고전하고 있는 반면 타이완의 TSMC가 호황을 만끽하고 있는 이유도 비슷하다.
TSMC는 2020년 기준으로 반도체 위탁생산 거래처가 523개에 달한 반면, 삼성전자는 거래처가 300개 정도에 그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각각의 특성을 고려해야 하겠으나 삼성전자는 대형 수요기업 중심으로 거래하는 반면, TSMC는 대형은 물론 소형까지 아울러 수요기업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TSMC는 스타트업이나 대학 연구실의 주문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고 한다.
특히, TSMC는 팹리스를 상대할 때 적극적으로 영업하는 반면, 삼성전자는 수요기업들이 찾아가 사정해야 거래할 수 있다고 한다. TSMC는 을의 입장에서, 삼성전자는 갑의 입장에서 영업한다는 것이다.
국내 석유화학기업들도 범용 중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스스로 연구개발 체제를 혁신함은 물론 플래스틱, 염·안료, 페인트 등과의 협업을 통해 가공제품의 품질을 향상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현재는 거래량이 커 협업이 이루어지는 필름을 제외하고는 제로라고 말할 수 있다.
삼성전자가 갑이라면 국내 석유화학기업들은 갑 중의 갑이라는 비아냥을 듣는다고 한다. 30-40년 전 플래스틱 사장이 석유화학 대리에게 머리를 조아렸다는 공급부족 시절의 허상은 잊어야 한다. 중국, 동남아, 유럽에서 벗어나 중남미, 아프리카로 발품을 팔아야 하고 국내 플래스틱 가공기업들과 더 친밀해져야 한다. 그리고 기술력이 있는 스타트업을 찾아 머리를 조아려야 한다.
국내 석유화학산업은 공급과잉률이 50% 이상이고, 갑의 시대는 종말을 고한 지 오래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