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이 반도체산업 부활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가운데 일본계 한국기업들도 반도체 소재를 중심으로 투자·연구개발을 확대하고 있다.
국내에는 일본 화학기업들이 직접 진출해 화학제품을 생산하고 있거나 합작투자를 통해 국내시장을 장악해가고 있으며, 일본의 종합무역상들도 일본산 수출을 중심으로 교역을 확대하는 가운데 한국산도 일부 수입하고 있다.
특히, 일본은 반도체, 전자, 자동차, 통신을 중심으로 화학소재의 경쟁력이 강해 일본산을 수입하지 않고서는 첨단제품 생산이 어려울 정도이며 일본산 화학제품의 국내시장 장악력도 갈수록 커지는 분위기이다.
한국과 일본이 강제징용, 위안부 문제를 놓고 감정적 대치에 돌입하고 일본이 한국에 대한 반도체·전자 소재 수출을 제한하면서 일본산 점유율이 일정수준 하락했으나 2023년 들어 상호 견제를 완전히 해소함으로써 일본산의 위상이 다시 올라가고 있다.
국내기업들이 반도체, 전자, 자동차용 화학소재를 중심으로 소재·부품·장비 국산화를 서둘렀으나 일부 성과에 그쳤고 일본산을 대신해 중국산 수입을 확대함으로써 수입제품의 국내시장 점유율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는 점에서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상당하다.
일본산 수입이 원활해짐으로써 더 이상 첨단제품 생산 차질이라는 걱정이 해소돼 다행이 아닐 수 없으나, 정부가 막대한 비용을 지원했음에도 불구하고 국산화 성과가 미미한 것은 크게 반성할 문제이다. 한국·일본 관계가 정상화돼 당장 문제가 되지는 않겠으나 국제관계 측면에서는 언제, 어떠한 문제가 돌출될지 알 수 없다는 측면에서 대책이 요구된다.
일본은 글로벌 반도체 매출 점유율이 2021년 기준 미국 46%, 한국 19%, 일본 9%로 미국은 물론 한국보다도 낮은 편이나 반도체 소재는 압도적인 경쟁력을 바탕으로 세계 시장을 장악하고 있고, 반도체 제조공정에 투입되는 황산, 염산, 불산 등 500가지 고순도 화학소재는 기술력이 뛰어나 포토, 에칭, 증착 공정에 특화돼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더군다나 일본이 반도체 부흥을 추진하고 있어 일본의 반도체 소재 공급망 장악이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만약, 일본이 반도체산업 육성에 성공해 한국을 견제하게 되면 삼성전자, SK하이닉스에 대한 반도체 소재 공급을 중단하거나 축소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일본기업들은 5나노미터(10억분의 1m) 이하 파운드리 반도체 공정에 필수적인 극자외선(EUV) 노광장비용 포토레지스트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JSR, 스미토모케미칼, TOK 중심으로 일본기업들은 글로벌 포토레지스트 시장의 90% 이상을 점유하고 있어 공급을 중단하면 삼성, SK는 물론 타이완 TSMC도 가동할 수 없는 처지이다. TSMC가 일본에 진출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일본은 반도체 고온 접착제로 쓰이는 폴리이미드의 90%, 불순물을 제거하는 고순도 불화수소의 70%, 아지노모토는 마이크로 절연 필름 시장의 90% 이상을 장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일본 정부가 반도체 부흥을 외치면서 TSMC를 비롯해 미국기업 유치를 본격화하고 반도체용 화학소재를 생산하는 일본 화학기업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고 있는 이유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일본 화학기업이나 무역상이 한국 진출을 확대하는 것은 환영할 일이고 상호 협력을 바탕으로 첨단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는 역할을 하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국내 화학기업들이 첨단 화학소재를 국산화하지 못한 채 일본산 의존도가 높아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며 자칫 무역분쟁을 일으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적극적 대응이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