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화학기업들이 배터리 분야에서 대규모 해외투자를 본격화하고 있다.
그동안 반도체, 디스플레이, 태양광 관련 시장이 형성되는 초기에 기술력을 앞세워 점유율을 장악했으나 시장 성장기가 본격화되면서 중국 등 해외기업의 대규모 투자에 밀려 경쟁력을 상실한 경험이 많기 때문에 고부가가치화에 집중하는 기존 전략과 더불어 선제적인 대규모 설비투자에 나서고 있다.
일본 화학제품 내수 감소가 불가피해짐에 따라 내부적으로 구조개편을 추진하고 있으나 지속적인 성장동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해외투자가 필수적이라고고 보고 경영자원을 집중 투입하고 있다.
아사히카세이, 습식 분리막 7억평방미터 건설
아사히카세이(Asahi Kasei)는 캐나다 온타리오(Ontario)에 분리막 공장을 건설할 예정이다.
전기자동차(EV) 및 플러그인하이브리드자동차(PHEV)에 탑재되는 LiB(리튬이온전지)용 습식 분리막 공장을 건설하며 제막부터 도공까지 일관생산체제를 구축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1차 프로젝트를 통해 생산능력 7억평방미터를 확립하며 전체 투자액은 1800억엔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투자비 부담을 경감하기 위해 혼다(Honda)와 협력을 추진하고 있으며 2024년 말 이전에 합작기업을 설립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이밖에 일본정책투자은행이 280억엔을 출자하며 캐나다 정부와 온타리오 주정부 역시 보조금을 지원할 예정이어서 아사히카세이의 출자액은 전체 투자액 중 절반 이하로 낮아질 예정이다.
다만, 나머지 투자액도 여전히 900억엔 상당으로 과거의 설비투자 계획에 비해 높은 수준으로 평가되고 있다.
아사히카세이는 분리막 사업에서 원래 유럽과 미국 진출을 함께 검토했으나 북미시장이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다는 판단 아래 북미 중에서도 미국에 비해 건설코스트 절감 등이 가능한 캐나다를 투자처로 선택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 선거 변수에도 IRA 변함 없다!
미국은 2022년 8월 시행한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을 통해 북미지역에서 최종 조립되거나 배터리를 조달한 전기자동차를 그린비히클로 명명하며 구매자에게 세액 공제 혜택을 주고 있다.
전기자동차 뿐만 아니라 배터리 및 관련 소재 생산기업들이 IRA 수혜를 받기 위해 북미지역에서 설비투자를 확대하면서 서플라이체인이 형성되고 있어 글로벌 트렌드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북미 투자가 필수가 되고 있다.
혼다는 아사히카세이와 별도로 캐나다 온타리오에 1조7000억엔을 투입해 전기자동차와 배터리 공장을 건설할 예정이며 분리막은 아사히카세이와 협력하나 양극재는 포스코퓨처엠과 합작기업을 설립해 조달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북미 전기자동차 시장은 최근 수요가 감소하며 판매 속도가 둔화됐을 뿐만 아니라 2024년 11월 대통령 선거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한다면 관련 정책이 변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됨에 따라 기존 성장세가 꺾인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시장 관계자들은 2030년까지 전체 신규 판매 자동차 중 절반 이상을 전기자동차로 전환하겠다는 미국 행정부의 목표 자체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며, IRA 시행 후 서플라이체인 형성이 일정수준 진행된 만큼 정권이 교체돼도 IRA 자체를 철회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아사히카세이는 정권 교체 가능성과 함께 건설기간 연장 리스크를 면밀히 검토하고 있으나 전고체전지 기술 발전을 감안할 때 캐나다 공장은 2030년대 초반에 투자 회수가 가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현재까지 북미지역에서 습식 분리막 투자 계획을 공개한 곳이 아사히카세이 외에는 신흥기업인 미국 엔텍(Entek) 뿐이라는 점에서 경쟁력을 충분히 갖출 수 있을 것으로 자신하고 있다.
건식 분리막 중심 투자 계획 선회
아사히카세이는 그동안 축적한 제조 노하우를 바탕으로 캐나다 공장에 신기술을 대거 도입하고 기재막과 도공막 생산 속도를 산업계 표준 대비 2배 가속화할 방침이다.
이후 배터리 생산기업의 설계나 니즈에 맞추어 도공막 라인업을 다양화하고 북미 서플라이체인 대형화 흐름에서 선두 지위를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아사히카세이는 북미지역의 전기자동차 및 플러그인하이브리드자동차 수요가 2023년 150만대에서 2030년 870만대로 급증하고 분리막 역시 2030년 53억평방미터로 2023년 대비 5.3배 급성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에 따라 2031년 북미 시장점유율을 30% 이상으로 올려놓기 위해 2차 및 3차 투자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으며 앞으로 1년 안에 구체적인 계획을 공개할 방침이다.
아사히카세이는 2012-2020년 인수액이 각각 1000억엔 이상에 달하는 대규모 M&A(인수합병) 프로젝트 4건을 추진하면서 2015년 약 2600억엔에 미국 분리막 자회사 폴리포어(Polypore International)를 인수한 바 있다.
폴리포어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에서 건식 분리막을 공급하고 있으나 최근 수익이 악화돼 2023회계연도(2023년 4월-2024년 3월) 1850억엔의 손실을 기록했다.
이에 따라 아사히카세이는 폴리포어의 주력제품인 건식 분리막이 아니라 습식 분리막이 높은 내구성과 안전성이 요구되는 전기자동차 배터리에 더 적합하다는 판단 아래 습식 분리막을 중심으로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그동안 습식 분리막을 일반 산업용으로만 공급했기 때문에 전기자동차용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도공막 생산능력을 대폭 늘려야 하는 상황으로 알려졌다.
전해액‧바인더 분야 설비투자 가속화
배터리 소재를 생산하는 일본 화학기업들은 앞으로 공세를 더욱 강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석유화학 분야에서는 미츠비시케미칼(Mitsubishi Chemical)이 MMA(Methyl Methacrylate)를 서로 다른 3개의 프로세스로 생산하며 지역별 특성에 맞추어 공급하면서 대규모 생산능력을 확보해 글로벌 최대 메이저 지위를 유지하고 있고, 반도체 소재 분야 역시 일본기업이 높은 점유율을 확보한 가운데 신에츠케미칼(Shin-Etsu Chemical), 스미토모케미칼(Sumitomo Chemical), 미츠비시케미칼, 아데카(ADEKA), 레조낙(Resonac)이 신증설 투자를 추진‧검토하는 등 시장 지배력 굳히기를 위한 움직임을 멈추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배터리 소재는 글로벌 분리막 시장을 중국과 한국기업이 대부분 장악해 아사히카세이는 4위에 머무르고 있으며 전해액 또한 미츠비시케미칼과 우베(UBE)의 합작기업 MU Ionic Solutions가 공세를 강화하고 있음에도 중국에 밀려 4위에서 올라가지 못하고 있다.
글로벌 자동차 판매대수 중 전기자동차가 차지하는 비중은 2023년 13%까지 확대됐으며 중국과 유럽이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 전기자동차용 배터리를 대량생산 가능한 기술을 보유한 곳은 한국, 중국, 일본 3개국뿐이나 중국은 전기자동차 판매비중이 22%에 달하며 60% 이상이 중국에서 구매되는 수량이기 때문에 중국산 전기자동차 뿐만 아니라 배터리, 소재 등의 영향력이 클 수밖에 없는 구조로 판단된다.
그러나 일본 화학기업들은 최근 미국-중국 무역갈등으로 중국산 배터리와 소재 등이 북미시장에 들어가기 어려워졌다는 것을 기회로 삼아 북미 투자를 적극화하고 있다.
미츠비시케미칼은 북미 전해액 공장의 생산능력을 2배로 확대할 예정이며, 우베는 2026년 11월 완공을 목표로 약 780억엔을 투입해 미국 루이지애나에 LiB 전해액 주성분인 DMC(Dimethyl Carbonate)와 EMC(Ethyl Methyl Carbonate) 공장을 건설할 예정이다.
구 도요잉크(Toyo Ink) artience는 미국에서 LiB용 도전조제에 사용하는 CNT(Carbon Nano Tube) 분산체 증설 투자를 진행하며, 제온(Zeon)은 2026년부터 미국에서 LiB 바인더를 생산할 방침이다.
도아고세이(Toa Gosei)는 최근 LiB용 바인더 사업에서 북미 진출을 검토하고 있으며, DNP는 100억엔을 투자해 2026년 미국에 LiB용 외장재 공장을 건설할 계획이다. (강)